기아가 플래그십 세단 K9의 생산을 올해 말 끝내기로 하면서, 2012년부터 14년 이어진 계보가 2세대로 마무리된다.
K9은 2012년 오피러스의 후속으로 나온 기아의 최상위 세단이다. 2018년 2세대로 완전변경을 거치며 5m가 넘는 차체와 V6 엔진을 얹고 기아 라인업의 맨 위를 지켜 왔다. ‘회장님 차’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상징성도 있었지만, 결국 판매 부진을 넘어서지 못하고 오토랜드 광명에서 생산을 멈추게 됐다.
이번 결정은 단순한 생산 중단이 아니다. 기아는 부분변경과 완전변경은 물론 연식변경 모델까지 개발하지 않기로 했다. 연식만 바꿔 가며 차를 계속 팔고 시간을 버는 선택지 자체를 닫아 둔 셈이다. K9을 대체할 신차종 개발 여부도 정해지지 않아, 업계에서는 기아가 대형 세단 시장에서 완전히 손을 뗀다는 관측이 나온다.
4년 만에 판매가 4분의 1로 줄었다

숫자를 보면 결정이 이해된다. K9의 국내 판매는 2022년 6585대에서 이듬해 3898대로 반 토막 났다. 2024년에는 1870대까지 내려앉았고, 2025년에는 1581대로 다시 15.4% 줄었다. 올해는 상반기 누적이 734대에 그쳤다. 4년 만에 4분의 1 수준으로 쪼그라든 셈이고, 지금 속도라면 올해 연간 판매도 1500대를 채우기 어렵다.
플래그십 세단은 원래 많이 팔리는 차가 아니다. 다만 브랜드의 얼굴 노릇을 하기 때문에 수익성이 떨어져도 유지하는 경우가 많다. 문제는 K9이 그 얼굴 역할마저 점점 하기 어려워졌다는 데 있다. 한 달에 100대를 겨우 넘기는 차를 위해 별도 생산 라인과 부품 공급망을 유지하는 부담이 커졌다.
제네시스와 SUV에 자리를 내줬다

가장 큰 이유는 같은 집안의 제네시스다. G80은 해마다 4만~5만 대, G90은 1만 대 안팎이 팔린다. 고급 세단을 원하는 소비자가 기아 전시장 대신 제네시스 전시장으로 향했고, K9은 ‘왜 제네시스가 아니라 K9이어야 하는지’를 끝까지 설득하지 못했다.
시장 자체가 바뀐 것도 컸다. 주행 성능과 편의 장비를 끌어올린 SUV로 수요가 몰리면서 대형 세단을 찾는 사람이 줄었다. 아래급인 현대차 그랜저가 차체를 키우고 고급 사양을 채워 위로 밀고 올라온 것도 부담이었다. K5와 K8이 하이브리드를 갖춘 것과 달리 K9에는 전동화 모델이 없었던 점도 발목을 잡았다.
남은 자원은 전기차 쪽으로 간다

기아는 K9을 정리하며 확보한 자원을 전기차와 소프트웨어 중심 차량 개발에 돌린다는 방침이다. 판매가 줄어든 대형 세단 한 대를 유지하는 비용을 전동화와 소프트웨어에 쓰는 편이 낫다는 판단이다.
고급 세단 수요는 제네시스가 받고, 기아는 SUV와 전기차, 목적기반차량 쪽에 힘을 싣는 그룹 내 역할 분담이 더 뚜렷해지는 모양새다. 화성에 PBV 공장을 세운 것과도 맞물린다.
국산 대형 세단의 선택지가 하나 줄어든다는 점은 남는다. 고배기량 가솔린 세단을 중심으로 한 전통적인 플래그십 수요가 구조적으로 줄고 있다는 신호이기도 하다. 단종이 확정된 차는 중고 시세가 한 번 출렁이는 경우가 많아, 남은 재고와 값이 어떻게 움직일지도 지켜볼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