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차를 살 때 가장 걱정하는 대목은 배터리다. 몇 년 타면 주행거리가 확 줄어드는 것 아니냐는 물음이다. 오스트리아의 전기차 배터리 진단 업체 아빌루가 이 질문에 숫자로 답했다. 2022년부터 올해까지 쌓인 50만 건 이상의 배터리 진단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다.
측정 지표는 SoH다. 새 배터리 대비 지금 남아 있는 용량을 백분율로 나타낸 값으로 ‘배터리 건강 상태’라고 부른다. 아빌루는 5만km와 10만km, 15만km 구간에서 각각 값을 뽑았다. 누적 데이터 포인트는 100만 건을 넘는다. 제조사가 아닌 제3자가 실제 차량을 진단해 모은 수치라는 점이 특징이다.
15만km에 93%가 남았다

결과부터 보면 우려만큼 나쁘지 않다. 15만km를 달린 시점에도 상위권 차들은 90% 초반대를 유지했다. 1위는 메르세데스-벤츠 EQA로 약 94%다. BMW i4가 약 93.6%로 뒤를 이었고 현대차 아이오닉 5가 약 93%로 3위에 올랐다. 코나 일렉트릭과 볼보 XC40 리차지도 상위 5위 안에 들었다.
아이오닉 5는 구간별 흐름도 완만했다. 5만km에서 97.2%, 10만km에서 95%, 15만km에서 92.8%를 기록했다. 국산 전기차 두 종이 나란히 상위권에 오른 것은 배터리 관리 기술의 성숙도를 보여 주는 대목으로 읽힌다.
테슬라는 90% 선에 걸렸다

반대편에는 테슬라가 있다. 모델 Y가 90.3%, 모델 3가 88.9%로 상위권과 3~4%포인트 차이를 보였다. 판매량이 가장 많은 브랜드가 배터리 잔존 성능에서는 앞서지 못한 셈이다. 다만 두 차 모두 15만km 시점에 90% 안팎을 지켰다는 점은 함께 짚어 둘 만하다.
가장 낮은 값은 닛산 리프에서 나왔다. 40kWh 배터리를 쓰는 초기형이 86.7%다. 미니 쿠퍼 SE 1세대가 87.1%, 르노 조에가 87.3%로 뒤를 이었다. 미니는 5만~15만km 사이 낙폭이 7%포인트로 가장 컸다. 하위권에는 출시 시기가 이르고 배터리 용량이 작은 모델이 몰렸다.
같은 차끼리 13.5포인트 벌어진다

이 조사에서 더 눈여겨볼 대목은 평균이 아니라 편차다. 같은 차종 안에서도 가장 좋은 차와 가장 나쁜 차의 SoH가 최대 13.5%포인트까지 벌어졌다. 테슬라 모델 Y는 15만km 시점에 82.9%부터 94.9%까지 흩어졌다. BMW i4도 87.5%에서 96.9% 사이에 분포했다.
같은 모델, 같은 주행거리라도 실제 주행 가능 거리가 수십 km씩 달라진다는 뜻이다. 배터리 열화를 좌우하는 것은 주행거리 자체보다 어떻게 쓰고 어떻게 충전했느냐다. 급속 충전 비중과 충전 잔량 관리, 주차 환경 같은 조건이 쌓인 결과가 이 편차로 나타난다.
그래서 중고 전기차를 살 때 평균값만 보면 놓치는 것이 생긴다. 마르쿠스 베르거 아빌루 최고경영자는 평균값만으로는 배터리 상태를 충분히 판단하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차량 계기판에 뜨는 값도 참고 지표에 가깝다. 표시 방식과 측정 조건이 제각각이기 때문이다.
실무적으로는 개별 차량의 진단서를 확인하는 편이 낫다. 배터리 상태가 중고 가격을 좌우하는 만큼, 소비자 입장에서는 숫자 하나보다 그 숫자가 어떻게 측정됐는지를 함께 봐야 한다.